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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그 3세 드 부르고뉴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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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위그 3세는 부르고뉴 공작 오도 2세와 샹파뉴 백작 티보 2세의 딸 마리의 아들이다. 그의 통치는 부르고뉴 공국의 비교적 평화로운 시대의 종말을 알렸으며, 프랑스 왕 루이 7세 및 필리프 2세와 국경 문제로 갈등을 겪었다. 위그는 프랑스 국왕에게 반기를 들었으나, 샤티용 포위전에서 패배하고 아들의 몸값을 지불하며 프랑스 영토에 대한 야망을 포기해야 했다. 그는 부르고뉴의 수도를 디종으로 옮기고 상업 중심지로 만들려 노력했으며, 제3차 십자군에 참여하여 아르수프 전투와 아크레 공방전에서 활약했다. 위그 3세는 두 번 결혼하여 여러 자녀를 두었으며, 1192년 아크레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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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그 3세 드 부르고뉴 공작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위그 3세의 인장
작위부르고뉴 공작
통치 기간1162년–1192년
이전 통치자외드 2세
다음 통치자외드 3세
가문부르고뉴 가문
아버지외드 2세
어머니마리 드 샹파뉴
배우자알리스 드 로렌 (1165년 결혼, 1183년 이혼)
베아트리스 달봉 (1183년 결혼)
자녀외드 3세
기 6세 드 비에누아
마르게리트 드 부르고뉴
출생일1142년
사망일1192년 8월 25일
사망 장소아크레

2. 생애

위그 3세의 통치 시기 부르고뉴 공국은 이전에 비해 평화롭지 못했다. 그는 호전적인 성향으로 프랑스의 루이 7세 및 그의 후계자 필리프 2세와 국경 문제 및 봉신 문제로 갈등을 겪었으며, 이는 1186년 샤티용 전투와 같은 군사적 충돌로 이어졌다. 이러한 갈등 속에서도 그는 1187년 수도를 디종으로 옮겨 상업 발전을 꾀하는 등 내정에 힘썼다. 이후 제3차 십자군에 참여하여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와 함께 살라딘에 맞서 싸웠으며, 아크레 정복과 아르수프 전투 등에서 공을 세웠다. 그러나 1192년 성지 아크레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생애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아래 하위 문단에서 다룬다.

2. 1. 초기 생애와 통치

위그 3세는 부르고뉴 공작 오도 2세와 샹파뉴 백작 티보 2세의 딸 마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통치가 시작되면서 부르고뉴 공국의 비교적 평화롭던 시대는 막을 내렸다. 위그 3세는 호전적인 성향의 인물이었으며, 프랑스의 루이 7세 국왕과 국경 문제를 두고 곧 갈등을 빚었다. 1180년 필리프 2세가 루이 7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자, 위그 3세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여러 영주들에게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도록 강요했다. 자신의 봉신을 잃게 된 필리프 2세는 이에 불만을 품고 1186년 부르고뉴 공국을 침공하여 샤티용을 포위했다. 결국 샤티용은 함락되었고, 도시를 방어하던 위그 3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오도 역시 포로로 잡혔다. 이후 평화 협상이 이루어졌고, 위그 3세는 아들의 몸값을 지불하고 프랑스 영토에 대한 야심을 포기해야만 했다.

1187년, 위그 3세는 부르고뉴 공국의 수도를 디종으로 옮기고, 도시를 주요 상업 중심지로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등 내정에도 힘썼다.

이후 위그 3세는 필리프 2세를 따라 제3차 십자군에 참전했다. 그는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 국왕(사자심왕)의 신뢰를 얻어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 살라딘에 맞서 싸웠다. 1191년 6월 필리프 2세가 프랑스로 돌아간 뒤에도, 위그 3세는 성지에 남아 프랑스 군대의 지휘관으로서 1191년 9월 7일에 벌어진 아르수프 전투와 아크레 공성전(아크레 포위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공을 세웠다. 그러나 1192년 1월, 아스칼론으로 진군하던 중 자신의 군대에 대한 급료 지급 문제로 리처드 1세와 갈등을 빚기도 했다.

위그 3세는 1192년 8월 25일 아크레에서 사망했다.

2. 2. 프랑스와의 갈등

위그 3세의 통치는 부르고뉴 공국의 비교적 평화로운 시대의 종말을 알렸다. 위그는 호전적인 인물이었고 프랑스 국왕 루이 7세와 국경 문제로 갈등을 겪었다. 1180년 필리프 2세가 루이 7세의 뒤를 잇자, 위그 3세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프랑스 왕의 봉신들에게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도록 강요했다. 자신의 봉신들을 빼앗긴 것에 분노한 필리프 2세는 1186년 부르고뉴 공국을 침공하여 샤티용을 포위했다. 결국 샤티용은 함락되었고, 도시를 방어하던 위그 3세의 아들 오도 3세 역시 포로로 잡혔다. 위그 3세는 결국 높은 몸값을 지불하고 프랑스 영토에 대한 야망을 포기하며 강화 조약을 맺어야 했다.

2. 3. 디종 천도와 내정

1187년, 위그 3세는 부르고뉴 공국의 수도를 디종으로 옮기고, 도시를 주요 상업 중심지로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등 내정에 힘썼다.

2. 4. 제3차 십자군 참여

위그 3세는 이후 프랑스의 왕 필리프 2세를 수행하여 제3차 십자군에 참여했다. 그는 아크레 공방전과 1191년 9월 7일의 아르수프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공을 세웠다. 또한 리처드 1세 (사자왕)의 신뢰를 얻어 함께 살라딘과 싸우기도 했다.

1191년 7월 필리프 2세가 프랑스로 돌아가자, 위그 3세는 프랑스 군대의 지휘를 맡게 되었다. 1192년 1월, 그는 아스칼론으로 이동했으나, 그곳에서 자신의 군대에 대한 보수 지급 문제를 놓고 리처드 1세와 논쟁을 벌였다.

위그 3세는 1192년 8월 25일 아크레에서 사망했다.

2. 5. 죽음

위그 3세는 자신의 열정을 성지로 돌려 필리프 2세의 수행원으로 제3차 십자군에 참여했다. 그는 아크레 공방전과 아르수프 전투 (1191년 9월 7일)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공을 세웠다. 1191년 7월 필리프 2세가 프랑스로 귀환하자, 위그 3세는 성지에 남은 프랑스 군대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리처드 1세의 신뢰를 얻어 함께 살라딘과 싸웠다.

1192년 1월, 위그 3세는 아스칼론으로 이동했으나, 그곳에서 자신의 군대에 대한 보수 지급 문제를 놓고 잉글랜드 왕 리처드 1세와 언쟁을 벌였다. 이후 1192년 8월 25일 아크레에서 사망했다.

3. 결혼과 자녀

위그 3세는 두 번 결혼했다.

1165년 마티아스 1세의 딸인 로렌의 알릭스(Alix de Lorraine프랑스어, 1145년 ~ 1200년)와 결혼했으나 1183년에 이혼했다. 이후 1183년 알봉 여백작 베아트리스(알봉 백작 기그 5세의 딸, 1161년 ~ 1228년)와 재혼했다. 각 결혼을 통해 여러 자녀를 두었다.

3. 1. 첫 번째 결혼

1165년, 마티아스 1세의 딸인 로렌의 알릭스(Alix de Lorraine프랑스어, 1145년 ~ 1200년)와 첫 번째 결혼을 했으나, 1183년에 이혼했다.

첫 부인 알릭스와의 사이에서 다음과 같은 자녀를 두었다.

  • 오도 3세 (1166년 ~ 1218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부르고뉴 공작이 되었다.
  • 알렉상드르 (Alexandre프랑스어, 1170년 ~ 1205년): 몽타귀(Montaigu) 영주 가문의 시조로, 베아트리스 드 몽타귀(Béatrix de Montaigu프랑스어)와 결혼했다.
  • 두스 (Douce프랑스어, 1175년 ~ 1219년경): 1196년 세뮈르의 영주 시몽 1세 드 스뮈르(Simon I de Semur프랑스어, ? ~ 1219년)와 결혼했다.
  • 알릭스 (Alix프랑스어, 1177년 ~ 1266년): 메르쾨르 영주 베로 7세(Béraud VII de Mercœur프랑스어)와 결혼했다.

3. 2. 두 번째 결혼

1183년, 알봉 여백작 베아트리스(알봉 백작 기그 5세의 딸)와 결혼하여 다음과 같은 자녀를 두었다.

  • 기그 6세 (1184년–1237년), 비엔의 도팽
  • 마오 (1190년–1242년), 1214년 샬롱 백작 장 1세와 결혼
  • 마르그리트 (1192년–1243년), 1222년 사보이아 백작 아메데오 4세와 결혼

4. 가계

위그 3세의 아버지는 오도 2세, 부르고뉴 공작이며, 어머니는 마리 드 블로아-샹파뉴이다. 친할아버지는 위그 2세, 부르고뉴 공작, 친할머니는 마틸다 드 튀렌이다. 외할아버지는 티보 2세, 샹파뉴 백작, 외할머니는 마틸다 폰 카린티아(스폰하임 가문)이다.

1165년, 로렌 공작 마티외 1세의 딸인 알릭스와 결혼했으나 1183년에 이혼했다. 두 사람 사이에서는 다음과 같은 자녀가 태어났다.


  • 오도 3세(1166년 ~ 1218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부르고뉴 공작이 되었다(1192년 ~ 1218년).
  • 알렉상드르(1170년 ~ 1205년): 몽타귀 영주 가문의 시조이며, 베아트릭스 드 몽타귀와 결혼했다.
  • 두스(1175년 ~ 1219년경): 1196년에 시몽 1세 드 스뮈르와 결혼했다.
  • 알릭스(1177년 ~ ?): 메르쾨르 영주 베로 7세와 결혼했다.


1183년, 알봉 여백작이자 알봉 백작 기그 5세의 딸인 베아트리스와 재혼하여 다음과 같은 자녀를 두었다.

  • 기그 6세(1184년 ~ 1237년): 비엔의 도팽이 되었다.
  • 마오(1190년 ~ 1242년): 1214년에 샬롱 백작 장 1세와 결혼했다.
  • 마르그리트(1192년 ~ 1243년): 1222년에 사보이아 백작 아메데오 4세와 결혼했다.

참조

[1] 서적 Sword, Miter, and Cloister: Nobility and the Church in Burgundy, 980–1198 Cornell University Press 1987
[2] 서적 The Third Crusade: Richard the Lionhearted and Philip Augustus University of Wisconsin Press 1969
[3] 서적 Richard I Yale University Press 1999
[4] 서적 The Third Crusade: Richard the Lionhearted and Philip Augustus University of Wisconsin Press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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